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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범죄자 안두희
    역사에 대해/우리나라 역사 2018. 10. 16.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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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범죄자 안두희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1년도 안 된 1949년 6월 26일낮 12시 45분

    "탕, 탕, 탕, 탕"


    초여름의 밝은 햇살이 쏟아지고 있는 경교장(오늘날 강북삼성병원) 2층에 있는 백범 김구 선생의 집무실에서 총성이 잇따라 울렸습니다. 아래층 응접실에 있던 비서 선우진, 이풍식, 이국태 등과 경비경찰 2명이 뛰어 올라갔을 때 백범은 이미 운명한 후였습니다. 총을 쏜 포병 소위 안두희는 도망치지 않고 스스로 권총을 내던졌습니다. 


    [안두희]


    비서진이 안두희를 구타하다 신고를 받고 달려온 서대문경찰서 경비주임에게 신병을 넘기려는 순간, 갑자기 어디선가 군인들이 나타났습니다. 이들은 범인이 현역 군인이란 이유로 비서진과 경찰관을 밀치고 서둘러 안두희를 스리쿼터에 태웠습니다. 김구 암살범 안두희를 탈취한 헌병 대위 김병삼은 필동 헌병사령부로 쏜살같이 달렸습니다. 득의만만한 표정의 김병삼은 스리쿼터에서 내리면서 부하들에게 명령했습니다. 

     "우선 안 소위를 의무실로 모셔라"


    김병삼은 곧장 사령부에서 대기하고 있던 전봉덕 부사령관에게 무사히 빼돌렸다고 보고했습니다. 전봉덕은 만면에 미소를 띄며 의무실로 들어갔습니다. 침대에 누워 있던 안두희는 벌떡 일어나 거수 경계를 했습니다. 


    전봉덕은 경무대로 달려가 신성모 국방장관과 신태영 육군 참모차장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에게 사건 전말을 보고했습니다. 이승만이 지시했습니다. 

     "장흥 헌병사령관을 딴 곳으로 보내고, 당장 전봉덕 부사령관을 승진시켜 수사를 맡기시오"


    전봉덕은 즉시 백범 김구 암살 사건에 대한 첫 공식 수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범인은 현장에서 바로 체포되어 헌병사령부에 수감됐습니다. 그러나 현장에서 상당히 폭행을 당했기 때문에 의식이 회복되기를 기다려 그 배후를 엄중 조사할 작정이나 현장에서 판명한 것은 1인 단독 행위인 듯하다"

     

    수사로 하기 전에 결론을 발표한 셈입니다. 이렇게 해서 안두희는 권력의 비호 아래 한국전쟁의 혼란 속에 자유의 몸으로 돌아갑니다. 


    백범 김구 암살 사건 당시 경교장에서는 사건 직후 서대문경찰서 외에는 어디도 미처 연락할 경황이 없는 황망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군복 청년들과 정복 헌병들은 쏜살같이 나타나 안두희를 싣고 바람처럼 사라졌을까요? 이미 전봉벅 부사령관은 보고 전에 사령부에 나와 있었고, 사건이 일어나기 전 김병삼 대위가 1시간 전엔 오전 11시 30분 경 사령부에 비상을 걸었던 것입니다. 사령부 본관 뒤에서는 지프차와 스리쿼터에 헌병 15-16명이 승차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백범의 영원한 비서였던 선우진 선생이 2009년 5월 17일에 타계했습니다. 그는 1949년 6월 26일 백범이 서가할 때까지 만 4년여 동안 백범을 그림자처럼 모셨습니다. 백범을 수행해 평양을 다녀오기도 했고, 백범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폈습니다. 그가 남긴 회고록 '백범 선생과 함께 나날들(2009)'의 한 대목을 읽어보면 


     "이미 안두희가 입에서 피를 토하며 마룻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이풍식 씨가 의자로 의자로 때려 눕힌 것이다. 나도 격분해 의자를 들어 안두희를 다시 후려갈겼다. 그 때 갑자기 군 작업복을 입은 괴청년 3-4명이 나타나 나를 제지했고, 경찰주임을 막고, 윽박지고며 안두희를 데리고 나가 문 밖에 있던 스리쿼터에 싣고는 서두러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수행비서로서 선생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말할 수 없는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평생 잊지 못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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