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빨치산에 대해서
    역사에 대해/우리나라 역사 2018. 10. 18. 06:00
    반응형

    지금도 유령처럼 떠도는 빨갱이라는 손가락질


    집안 어른의 좌익 활동 때문에 고초를 겪은 유명인사는 우리 주변에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문인들만 해도 시인 고은, 소설가 이문열, 김성동, 김원일, 김원우 등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치인들 중에서도 2002년 대선 때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였던 권영길 후보가 빨치산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공격을 받았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당시 당내 경쟁자들로부터 빨치산의 사위라서 대선 후보로는 부적절하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노무현 후보는 장인의 전력이 문제가 되자, 

    "그럼 사랑하는 아내를 버리란 말인가? 그런 아내를 가진 사람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면 나는 후보를 그만두겠다."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연좌제에 분연히 맞섰습니다. 

     또다른 사례는 독립운도가 김순애 여사의 이야기 입니다.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은 친일파가 득세한 이승만 정권에서 고통을 많이 겪었습니다. 그러나 4.19혁명으로 이승만이 물러났는데도 김 여사의 여권이 상당 기간 안 나왔습니다. 이분 자신이 독립운동으로 포상을 받기도 했지만, 남편이 상하이 임시정부의 부주석을 지낸 김규식 박사입니다. 김규식 박사는 해방 후에는 이승만, 김구와 함께 우익 3영수로 꼽힌 분입니다. 그런데 한국전쟁 때 김 박사는 납북됐고, 그 부인은 좌익에 협력한 것으로 남아 있다는 이유로 여권이 안 나온 것입니다. 그 유명한 독립운동가 김규식 박사의 부인이자 독립운동가인 김순애 여사가 이런 일을 당했을 정도이니, 힘없는 서민들은 얼마나 많은 불이익을 당했을까요? 


    연좌제는 공식적으로는 사라졌으나, 앞의 예에서 보듯이 정적이나 자신들과 반대의견을 가진 이들을 공격하는 최고의 무기로 살아남아 21세기 대한민국을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대한민국의 빨치산은 어떻게 생기고 어떻게 역사 속에서 사라졌을까요? 


    빨치산에 대해서


    남한에서 빨치산 투쟁이 벌어진 것은 1948년 2월 유엔이 38선 이남에서라도 선거를 치르기로 결정한 것이 시발점이었습니다. 이후 제주도 4.3사건, 여순 사건은 같은 좌익이 주도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 투쟁이 격화 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이 지리산과 태백산을 중심으로 무장 투쟁을 벌였습니다. 

    이들이 바로 빨치산입니다. 그러나 잇다른 군경의 토벌 작전에 밀려 세력이 점차 약화됐습니다. 국방부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남한에 잔존해 있는 빨치산은 지리산 이현상 부재 100명을 비롯해 460명 정도라고 추정했습니다. 


    그란 약화되어 가던 빨치산 투쟁은 1950년 9월 인민군의 전면 후퇴로 다시 격화되었습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막힌 인민군과 노동당원, 인민공화국 치하에서 활동하던 남한 좌익은 전선의 후방에서 본격적인 유격전을 벌였습니다. 이들의 규모는 모두 2만 5천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이들이 후방에서 파괴 활동을 벌이자 이승만 정부는 1951년 10월 15일 빨치산 토벌을 전담할 국군 제3군단을 창설해 본격적인 토벌 작전을 벌였습니다. 한국전앵이 한창인데 전선에서 3개 사단을 뺏으니 결과적으로 빨치산 투쟁이 인민군에게 큰 도움을 준 셈입니다. 

     

    그러나 군경은 토벌 작전 와중에 엉뚱하게 수많은 양민들이 학살당했습니다. 1050년 11월부터 1951년 2월까지 수 많은 양민들이 학살당했습니다. 총만 들었다하면 적과 아군을 구분하지 않고 총질을 해댔으니 죄 없는 무수한 양민들만 희생된 것입니다. 




    1952년 2월 8일 종료된 토벌작전에서 빨치산은 사살 7천여 명에 포로 6천여 명이라는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빨치산을 주도하던 박헌영 부수상 겸 외상이 1953년 8월 8일 북한에서 숙청된 것입니다. 그리고 북한은 남한 내 빨치산들을 내치기로 결정했습니다. 


    남과 북이 모두 빨치산을 버린 것입니다. 

    1963년 11월 12일 최후의 빨치산 아홍이가 사살되고 정순덕이 총상을 입고 체포되면서 한반도에서 빨치산 투쟁은 종언을 고했습니다. 


    지리산 일대에서 4년 간 토벌대를 이끌고 빨치산을 소탕했던 차일혁 총경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새벽부터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들에게 물어봐라. 공산주의가 무엇이며, 민주주의가 무엇이냐고, 지리산에서 사라져 간 수 많은 군경과 빨치산들에게 물어보라. 너희가 왜 죽었느냐고, 민주주의를 위해서 또는 공산주의를 위해서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자 몇 명이나 있겠는가? 

    반응형

    '역사에 대해 > 우리나라 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차일혁 경무관  (0) 2018.10.19
    한국전쟁시 미군의 무자비한 폭격  (0) 2018.10.18
    애국시민 박기서  (0) 2018.10.17
    한국의 범죄자 안두희  (0) 2018.10.16
    서북청년회 의 만행  (0) 2018.10.15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