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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국시민 박기서
    역사에 대해/우리나라 역사 2018. 10. 17.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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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국시민 박기서


    백범 김구 암살범 안두희의 경우 무려 4명의 의인들이 릴레이하듯 그의 행적을 추적해 결국 처단했습니다. 


    이승만의 폭정이  4.19혁명을 일어나게 했습니다.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 그해 김구 선생 11주기 추도식이 효창공원에서 열렸습니다. 암살당한 후 11년 만에 처음으로 열린 공식 추도식이였습니다. 이 자리에서 백범선생 살해 진상규면투쟁위윈회 가 발족해 활동에 들어갔습니다. 


    이승만이 쫓겨나자 잠적한 안두희에 대한 추적 작업도 시작되었습니다. 


    첫번째, 광복군 3지대 간부 출신인 김용희가 종로 2가에서 안두희를 발견하고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인 끝에 붙잡아 검찰에 넘겼습니다. 그러나 일사부재리 원칙과 공소시효 10년이 지났다는 이유로 처벌 할 수 없었습니다. 


    두번째 응징자는 김제 출신의 열혈청년 곽태영이 나섰습니다. 그는 1965년 12월 22일 강원도 양구군 중리에서 안두희를 찾아내 잭나이프로 목을 찌르고 돌로 머리를 쳐 중상을 입혔습니다. 


    세번째 응징자는 권중희였습니다. 그는 1992년 4월 12일 인천의 아파트에 숨어 사는 안두희를 찾아내 정의봉으로 두들겨 패며 배후를 밝히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이 때 안두희는 중대한 고백을 합니다. 

     "백범 암살 6일 전인 6월 20일 경무대 집무실로 불려가 이 대통령으로부터 신성모 국방부 장관한테 얘기 많이 들었다. 높은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잘하라는 격려를 받았다."


    네번째 응징자는 박기서 씨였습니다. 

    1966년 10월 23일 오전 11시 30분 경, 인천의 한 아파트에 몽둥이를 든 중년 남성이 들이닥쳤습니다. 몽둥이에는 정의봉 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는 경기도 부천에서 택시기사로 일하는 박기서라는 평범한 가장으로 평소 "백범 김구 선생 암살범이 천수를 다하는 것을 지켜볼 수 없었다 "" 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안두희를 처단하기로 결심한 후 부천시장의 그릇 가게에서 홍두깨 비슷한 몽둥이를 4천 원 주고 사서 안두희 집으로 달려간 것입니다. 박기서 씨는 누워있는 안두희에게 장난감 권총을 겨누며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권총이 불을 뿜는다 고 고함을 쳤습니다. 이어 준비해간 나일론 끈으로 두 손을 뒤로 묶고 정의봉으로 사정없이 구타했습니다. 

    숨이 차면 냉장고에서 찬물을 꺼내 마시면서 계속 두들겨 팼습니다. 이윽고 안두희는 욕된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박기서는 안두희가 숨진 것을 확인하고 곧바로 택시를 타고 신곡본동 성당으로 가서 고해성사를 한 후 경찰에 자수했습니다. 




    박기서가 구속되자 사회 각계 인사들이 백범 암살범 안두희 처단 박기서 의사 석방대책위원회를 구성해 9200명의 명의로 인천지방법원에 탄원서를 제출했습니다. 

    박기서 씨는 3년형을 선고 받고 감옥살이를 하다가 김대중 대통령의 3.1절 특사로 1년 4개월 만에 풀려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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