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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복군-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무산되다
    역사에 대해/우리나라 역사 2018. 10. 11.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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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군-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무산되다 


    일본의 패망이 얼마 남지 않은 1945년 1월 31일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앞에서 젊은이들의 우렁찬 합창 소리가 들렸습니다. 

    광복군 교관 진경성의 인솔로 조선 청년 47명이 드디어 임시정부 청사에 도착한 것입니다. 이들은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다 강제 징집된 뒤 중국에 주둔한 일본군 병영에서 목숨을 걸고 탈출한 지식인 청년들이였습니다. 청년들은 장제스의 군부군이나 마오쩌둥의 팔로군의 도움을 받아 안후이성 광복군 3지대에 도착해 3개월의 훈련을 받고 머나먼 길을 걸어 충칭까지 온 것입니다. 


     김구 주석이 이끄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15일 광복군 창설을 공포했습니다. 시작은 30여 명의 자그마한 군대였습니다. 그러나 김원봉이 이끄는 한인 무장부대와 일본군에서 탈출한 김준엽과 장준하 등 한인 청년들이 합류하면서 점차 세력을 불려나갔습니다. 

     김구 주석 등은 미군과 협의해 대원들이 잠수함이나 낙하산으로 한반도에 침투해 정보 송신과 유격대 조직 구성, 일본군 시설 파괴 등을 수행하기로 했습니다. 이틀 후인 8월 9일 50명의 광복군에게 특별 대기령이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오후에 청천벽력 같은 한 통의 전보가 OSS 중극지부에 날아왔습니다.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해 무조건 항복한다는 내용이였습니다. 김구 주석에게는 희소식이 아니라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였습니다. 


    일본이 패망했는데도 한반도에 상륙한 미군은 충칭 임시정부에 대해 나 몰라라 하며 냉대했습니다. 장제스 정부를 통해 여러 차례 사정한 끝에 11월 23일 미군 수송기편으로 귀국하는 일정이 겨우 확정되었습니다.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이미 10월 1일에 맥아더 장군이 주선한 비행기를 타고 도표를 경유해 귀국한 상태였습니다. 임시정부 요인들보다 1개월 이상 빠른 귀국이였습니다. 맥아더는 미 육군 남조선주둔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하지 중장을 도쿄로 불러 이승만과 함께 3자회담을 가졌으니, 그 의도는 미루어 짐작할 만합니다. 


    김구 주석 등 한국 1진 15명은 1945년 11월 23일 상하이 비행장에서 미군 수송기 편으로 귀국길에 올랐습니다. 수송기는 저녁 무렵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했습니다. 미 군정이 김구 주석의 귀국 사실을 의도적으로 숨겨 환영객 하나 없는 쓸쓸한 귀국이였습니다. 


    가끔은 부질없는 꿈을 꿉니다. 일제가 저렇게 패망하지 않고 악착같이 버티는 사이에 임시정부의 광복군이 잠수함과 낙하산을 이용해 성난 파도처럼 국내에 진격해 들어오고, 조선의용군으 압록강을 , 88여단은 두만강을 넘어 일제를 무너뜨리고 우리 힘으로 해방 쟁취하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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