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한국전쟁-대통령은 야반도주, 고관대작들은 피난 경쟁
    역사에 대해/우리나라 역사 2018. 10. 12. 16:36
    반응형

    한국전쟁-대통령은 야반도주, 고관대작들은 피난 경쟁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전쟁이 터진 지 불과 이틀 만에 서울 시민들 몰래 새벽에 측근 몇 명만 데리고 황망히 서울을 떠나 남쪽으로 도주했습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전쟁이 터지자 국민들은 내팽개치고 혼주 야반도주를 해 버린 것입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T-34 탱크 240 여 대를 앞세를 인군군 7개 사단 9만 명이 38선을 넘어 기습남침을 시작했습니다. 국군의 방어선은 모든 전선에 걸쳐 맥없이 붕괴되었습니다. 이날 오후 2시에 열린 국무회의에서 채병덕 육군 참모총장은 후방 사단을 전선으로 보내 반격을 가하면 격퇴할 수 있다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이승만은 국회본회의가 열리고 있던 시각인 새벽 3시 반, 남행열차에 탑승했습니다. 피난 일행은 부인 프란체스카와 경무대 경찰서장 김장홍, 비서 황규면, 경호경찰 등 달랑 6명이였습니다. 아마 한민족 역사상 국가원수로는 가장 초라한 규모의 피난 행렬이었을 것입니다. 이승만의 야반도주는 극비사항이였습니다. 신성모 국방장관과 경무대 일부 비서진을 빼고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수도 사수라는 지킬 수도 없고, 의지도 없는 결의를 하고 집에 돌아온 국회의원들은 가족들을 데리고 촌각을 다투며 서울 빠져나가기 경쟁을 벌였습니다. 수도 사도 결의안을 접수할 정부가 도망친 것을 안 신익희와 조봉암은 국회로 돌아와 이 사실을 알리고 산회를 선포했습니다. 


    의원들은 술렁거기며 집으로 달려와 짐을 꾸리기 시작했습니다. 신익희 국회의장마저 참모인 윤길중에게 안심을 시키고는 아무런 연락도 없이 가족과 함께 서울을 빠져나갔습니다. 


    한국 전쟁 발발 후 서울 시민이 들은 정부의 공식 발표는 모두 여섯 차례였습니다. 

    가장 악영향을 끼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담화였습니다. 그는 피난간 대전에서 자신이 서울에 있는 걸로 위장하고 녹음한 연설을 통해 유엔이 우리를 도와 싸우기로 했고, 도우니까 국민들은 굳게 참고 있으면 적을 물리칠 수 있으니 안심하라고 말했습니다. 

     이 방송을 듣고 피난 보따리를 싸들고 길을 떠난 많은 서울 시민들이 다시 주저 앉았습니다. 


    서울 시민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른 정부 요인들은 대통령이 대전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일제히 대전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이승만은 충남도지사 공관을 숙소로 정하고, 이시영 부통령을 비롯한 대부분의 고위 공무원들은 대전 시내에 있는 여관 '성남장'에 모였습니다. 건편 200평으로 큰 여관이였지만, 300명이 넘는 각료와 국회의원, 고급 관리, 장군, 재계 인사들이 한꺼번에 묵었으니 혼잡 할 수 밖에 없었죠. 


    7월 1일 이승만은 서울에서 그랬듯이 다시 한번 비밀리에 숙소인 충남도지사 공관을 떠나 이리~목포를 거쳐 배를 타고 부산으로 향했습니다. 대통령이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정부 요인들도 서둘러 대전역을 통해 빠져나갔습니다. 


    후에 국회의원들은 대통령이 국방을 등한시 하고 정부가 경솔하게 행동해서 서울 시민과 국민들을 전란의 회오리에 몰아넣었다는 점을 지적했고, 이 같은 결의를 전달하기 위해 이승만을 찾아간 신익희 국회의장과 장택상, 조봉암 부의장은 천만뜻밖의 말을 들었죠. 

     "내가 왜 국민 앞에서 사과해? 사과할 테면 당신들이나 하세요!"

    이승만은 화를 버럭 내며 자지를 나가버렸습니다. 


    심지어 이토록 파렴치한 행태를 보인 최악의 지도자 이승만을 대한민국의 국부라고 칭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 불가사의한 일입니다. 



    반응형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