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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자 안중근이라 불린 독립운동가 남자현
    역사에 대해/우리나라 역사 2018. 10. 8.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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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 안중근이라 불린 독립운동가 남자현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벌어진 독립운동 전선에는 남녀 구분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합심해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밤낮으로 애를 썼고, 분투했습니다. 


    그러나


    신체적 특성상 여성의 몸으로 직접 총을 들고 일제를 처단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61세의 나이에 총을 들고 싸우다 순국한 여성, 그녀의 이름은 남자현 (1872~1933) 입니다. 




    조선총독 암살을 꾀했으나 미수에 그치고, 전 세게에 우리의 독립의지를 알리려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고, 만주국의 실세를 제거하려다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는 등 파란만장한 투쟁의 삶을 산 여성입니다. 


     경북 양양 출신의 평범한 아낙네였던 남자현의 삶에는 몇 번의 커다란 분기점이 있었습니다. 열아홉에 시집을 가서 단란한 가정을 꾸렸고, 1906년에 남편 김영주가 명성 왕후 시해 사건에 분격해 의병을 일으켜 일본국과 싸우다 전사할 때까지 그녀의 삶은 시골의 여느 아낙과 다를 바가 없었습ㄴ디ㅏ. 남편이 죽은 후에도 삼대 독자인 유복자를 기르며 시부모 봉양에 정성을 다해 효부상까지 받았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시대는 그녀의 삶을 통째로 흔들었습니다. 1919년 2월 말, 간단한 봇짐을 들고 경성에 올라온 남자현은 3.1운동이 터지자 교회 신자들과 함께 뜨겁게 만세 운동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날 남편이 임종 때 입었던 피 묻은 저고리를 끌어안고 만주로 올라가 독립 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때 나이 마흔일곱이었습니다. 

    만주로 넘어간 그녀는 서로군정서에 합류해 독립운동에 가담하는 한편, 동만주 일대에 12곳의 교회를 세우고 10여 곳에 여자교육회를 설립해 여성 계몽과 조선 해방 운동에 성심을 다했습니다. 


    일제의 만주 침공 2년 후인 1933년 2월 27일 오후 3시 45분, 하얼빈의 도의정양가 거리에 삐익! 바라믕 가르는 호루하기 소리가 들렸습니다. 일본 경찰 10여명이 따라붙었고, 이 때 조선 여인 남자현을 붙잡혔습니다. 그녀는 옷 안에 피 묻은 군복을 껴 입고 있었습니다. 오래 전 남편이 의병 운동을 하다 전사할 때 입고 있던 것을 그대로 걸친 것이였습니다. 그해 1월 초, 만주의 일제 최고 실세인 무토 노부요시 진권대사를 사살하기로 했지만, 이 정보를 탐지한 일본 경찰에게 검거가 된 것입니다. 


    감옥에서 잔혹한 고문과 추궁에 시달리다가 8월 6일부터는 단식 투쟁에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곡기를 끊고 11일이 지나자 남자현은 사경을 해매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일본 경찰은 서둘러 병보석으로 석방을 했죠. 아들 김성삼과 손자 김시련이 서둘러 달려왔습니다. 그녀는 풀려난 지 닷새만에 순국했습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다른 누구보다도 남자현의 고향인 경북 영양 군민들의 아픔과 충격이 컸습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8월 22일이 남자현 의사를 기리는 추념회가 열렸습니다. 이어 1962년 3월 1일 윤보선 대통령은 남자현에게 독립운동자 건국공로훈장을 수여했습니다. 모두 58명이 복장을 받았으며 여자로는 남자현이 유일했습니다. 


    61세 나이에 총을 들고 순국의 길로 당당히 걸어간 남자현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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