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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국한 강우규 의사
    역사에 대해/우리나라 역사 2018. 10. 4.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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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총독에게 폭탄을 던지고 순국한 64세 강우규 의사


    3.1운동의 여진이 채 가라앉지 않은 1919년 9월 2일 오후5시 남대문역(오늘날 서울역), 이날 경성의 날씨는 무더웠습니다. 새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을 경호하기 위해 역 주변은 물론 남삼 중턱 조선 총독부 청사에 이르기까지 일본 군경이 촘촘하게 깔려 있었습니다. 


                                                 [강우규 의사]


    일본군은 귀빈을 맞기 위해 의장대 1개 중대와 보병 2개 대대를 도열병으로 동원했습니다. 

     신임 총독이 탄 열차가 미끄러지듯이 플랫폼으로 들어섰습니다. 하얀 해군대장 복장을 한 사이토 총독이 열차에서 내려 마중 나온 인사들과 악수를 나눈 후 귀빈실을 거쳐 역 광장에 나왔습니다. 광장에는 사이토 총독 부부가 탈 마차와 정무총감 부부가 탈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마차 옆에는 수행원들이 탈 인력거가 두 줄로 늘어서 있었습니다. 


    마부가 고삐를 당기자 말이 앞발을 내디뎌 마차 바퀴가 구르기 시작했을 때, 때를 맞춰 인근 한양공원에서 예포 17발이 울려 퍼졌습니다. 


    그 순간, 역 광장에 있는 다방 인근에서 검은 물체 하나가 마차 근처로 날아왔습니다. 

    "쾅"

    이날 거사로 대규모 인명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현장에서 무라다 육군 소장, 혼마치 경찰서장, 구보 만주철도 이사를 비롯해 신문기자, 경찰, 철도와 차량 관계자 등 37명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중상자 가운데 2명은 나중에 후유증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아쉽게도 표적이였던 사이토 총독은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습ㄴ디ㅏ. 그가 탄 마차에서 대여섯 조착의 파편이 박힌 것이 발견되었고, 그의 혁대에서 파편 몇 조각이 발견된 정도였습니다. 


    현장에서 범인 검거에 실패한 일본 경찰은 보름뒤인 9월 17알 악질 경찰로 유명한 김태석이 동지의 집에 은신 중이던 강우규 의사를 검거했습니다. 일본 경찰의 발표를 보고 다들 놀란 것은 폭탄 투척범이 64세의 호호백발 노인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신문에는 범인의 얼굴이 처음 공개되었는데, 흰 두루마기 차림에 머리칼과 수염 모두 하얀색이었습니다. 

     평안도 덕천 출신인 강우규는 북간도로 이주해 교육 사업을 벌이다 새 총독이 부임한다는 소식을 듣고 러시아에서 폭탄을 구입해 사타구니에 숨긴채 경성에 잠임했습니다. 강우규 의사는 신문에 난 사진을 보고 신임 총독의 얼굴을 익히고, 며칠 전부터 역 주변의 지형을 두루 살폈습니다. 거사 당일 사이토 총독이 탄 마차가 출발하려는 순간 마차를 향해 힘껏 폭탄을 던졌습니다. 폭탄이 터진 후 역 광장이 아수라장이 되자 유유히 사건 현장을 빠져 나온 것입니다. 


    강우규 의사는 일제의 법정에서도 의연하게 대처했습니다. 처음에 "피고"라고 부르던 일본인 판사가 의사의 인격에 압도외어 '강 선생'또는 '영감님'이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1심에서 사형을 인도받은 의사는 항소했습니다. 이즌 자신의 거사에 연루되어 고생하는 최자남, 허형, 김종호 드을 변호하고 의거의 뜻을 널리 알리기 위한 것이였습니다. 사형이 확정된 뒤 강우규 의사는 매일 성경을 읽고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하면서 평온한 마음으로 마지막 날을 기다렸습니다. 


    1920년 11월 29일 강우규 의사는 사형대에 섰습니다. 그리고 의연히 순국했습니다. 같이 수감된 수인들은 그가 사형 전날까지 담담하게 성경을 탐독하며 태연자약했다고 전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국내외의 젊은이들은 의열단과 흑색공포단 등 각종 비밀 결사를 만들어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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