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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방 후 친일파가 득세한 세상
    역사에 대해/우리나라 역사 2018. 10. 3.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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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후 친일파가 득세한 세상


    중국에서 27년간 무장 투쟁을 벌인 광복군 부사령관 김원봉은 해당 후 석달이 조금 지난 1945년 12월 1일 꿈에도 그리던 조국에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김원봉은 그로부터 3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48년 남북에서 정부가 수립되기 전 마지막 회담인 평양의 남북한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석한 뒤 북한에 남았습니다. 

     공산주의자가 아닌 김원봉이 북한을 선택한 건 친일 경찰 노덕술의 폭력이 결정이이었습니다. 그는 생전에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경찰서에 붙잡혀가 대표적인 악질 친일파 노덕술한테 뺨을 맞고 욕설을 들었다. 내가 조국 해방을 위해 중국에서 일본 놈들과 싸울 때도 이런 수모를 당하지 않았는데,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파 경찰 손에 수갑을 차고 모욕을 당했으니,   의열단 활동을 같이 했던 유석현 집에 가서 꼬박 사흘 간 울었다"




    좌익 계열인 민족주의 민족전선에 가담한 김원봉은 전국적인 파업 투쟁의 배후 조종자라는 혐의로 연행되었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참담한 모욕을 당한 것입니다. 


    친일 경찰 노덕술은 누구인가?


    해방 후 1주일 동안 전국에서 경찰관에 대한 군중들의 폭행 사건이 177건 발행했습니다. 이 가운데 111건이 조선인 경찰에 대한 보복이었습니다. 침략 당사자인 일본 경찰보다 조선인 경찰을 더 미워한 것은 그들이 일본인보다 더 악랄하게 굴었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 가장 악명을 떨친 인물이 김원봉의 뺨을 때리며 모욕을 가한 악질 친일 경찰 출신 노덕술이었습니다. 


    노덕술은 일제하에서 경찰로 일하면서 체포된 학생, 사회주의 운동가, 신간회 간부 등 나이, 성별, 좌우를 가리기 않고 숱한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해 무자비한 고문을 가했습니다. 그 결과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고문을 받다가 또는 그 후유증으로 목숨을 잃었습ㄴ디ㅏ. 

     

    노덕술은 김원봉이 의열단을 창설하면서 만든 칠가살(죽여도 되는 친일파 일공 종류) 명부에 이름도 올라가 있습니다. 그런 노덕술이 항일 운동의 신화적 존재인 김원봉을 붙잡아 취조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독립투사에 대한 모독'이라는 여론이 들끊었습니다. 결국 미 군정이 여론을 의식해 김원봉을 석방했습니다. 


                                                     [노덕술]


    그러나 이 사건으로 김원봉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평생 조국 독립을 위해 싸운 자신이 해방된 조국에서 친일 주구에게 고초를 받아야 하는 모순된 현실에 절망했습니다. 그래서 김원봉은 평양행을 결심한 것입니다. 


    북한 정부 수립에 참가한 김원봉은 국가검열상을 거쳐 1954년 노동상, 1957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부위원장을 지내며 안착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에 반대하고 스위스와 같은 중립국 통일 방안을 주장하면서 김일성 눈 밖에 났습니다. 


    결국 '장제스의 스파이'라는 어이없는 죄명으로 숙청돼 묘소 하나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역사에서 지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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